내가 사랑한 여자들

첫 사랑의 여인 - 돌아오지 않는 시간

악나라 수호자 2023. 10. 30. 12:40

미완의 사랑은 결혼보다 아름답고, 처절한 사랑은 미완의 사랑보다 감동적이다. 추억은 처절한 사랑과 미완의 사랑의 결정체이며, 지구가 독약을 먹고 자살을 하더라도 죽지 않는 불멸의 혼이다. 결혼은 추억을 잡아먹는 살인마다. 인간은 그런 살인마의 먹이가 되어 죽도록 죽고 싶어 하는 자살 충동자다. 살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거늘 스스로 죽도록 죽기를 마다 않고 살인마의 입속으로 전진하고 있으니 어찌 미쳤다고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미쳐간다. 미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미친 세상, 이것은 정상이다.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헛것을 보고 그 허상을 쫓다가 결국 그 허상에 몸을 바친다. 이것이 인간이다. 살인마의 먹이가 되어 죽었다가 살아난 인간은 다행히 제정신이 든다. 그러나 또다시 왼쪽 옆구리에는 폭탄을, 오른쪽 옆구리에는 휘발유 통을 끼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들이 불 속에서 아우성이다. 서로 죽자고 마지막 파티를 벌인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환장해 있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인간이 있다.

오천여 평 넓이의 둥근 학교 운동장이 눈부시다. 발목의 훨씬 윗부분을 덮을 정도로 소복이 쌓인 눈 때문이다. 학교 앞산 소나무 숲을 비집고 나온 아침햇살을 받으니 눈은 더욱 빛난다. 아직 어느 누구도 학교에 들어간 흔적이 없는 것처럼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다. 발을 내 딛기가 아깝다. ()에서 발광하는 눈(), 아지랑이 같이 피어오르는 눈()빛이 내 눈빛과 마주치자 나는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았다. 신에게 기도하듯이. 인간이 신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시력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신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 신의 그림자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다행히 시력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학교 운동장의 눈()은 신은 아니기에 내 눈을 멀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천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경외감을 주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학교 정문 맞은편에 길게 늘어진 이층 학교 건물 지붕 위를 보니 그곳에도 눈은 소복이 쌓여있다. 학교의 목조 건물 표면은 검은 송판을 겹겹이 붙여 만들었다. 검은 색의 학교 건물 외벽과 대조되어 학교 지붕 위와 운동장에 쌓인 하얀 눈은 더욱 희게 보인다. 운동장 주위로 빽빽이 둘려 심어진 교목인 향나무 위에 내린 눈이 약한 바람에도 견디지 못하고 흩날리며 운동장 안으로 떨어진다. 나는 한 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내 눈앞에 펼쳐진 설경의 장관을 바라본다. 학교 안으로 들어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인다. 눈 내림에 마음이 설레어 다른 날보다 일찍 학교에 온 관계로, 아직 아무도 학교 안으로 들어간 흔적은 없다. 천사들과 어울리는 설경의 운동장에 나의 발자국을 제일 먼저 낸다는 것이 망설여진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난다.

 

금희, 금희다.

 

난 순간적으로 움찔한다. 내 작은 몸이 연한 바람 앞의 촛불처럼 떨려온다. 내안에서 세찬 파도 물결이 일렁인다. 평소에 가까이 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의 꽁무니에서 어정쩡하게 놀던 나 같은 사람이 금희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금희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 같다. 그가 눈을 먼저 밟아야 할 것 같다.

「너, 이렇게 일찍 웬일이야. 왜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하는 거야.

금희의 질문에 나는 묵묵부답이다. 평소에 그렇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금희였지만 막상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어오니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나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삐죽 삐쭉 뒷걸음만 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나, 먼저 간다.

금희는 항상 그런 것처럼 쌀쌀하고 도도하다. 치마를 나풀거리고 눈을 사뿐 사뿐 밟으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런 금희를 넋을 놓아 쳐다본다. 나도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 입구에 도착한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뒤를 돌아다본다. 발자국은 한 사람의 것만 보인다. 그 발자국을 한참동안 바라다본다. 마음이 달뜬다. 달뜬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가니 금희가 자기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내가 들어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책만 읽고 있다. 나와 금희만이 있는 교실의 긴장감이 엄습해 온다. 숨이 차다. 가슴이 답답해 온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황급히 창문 곁으로 다가간다. 창문을 열고 운동장을 내다본다. 아직도 발자국은 한 사람의 발자국뿐이다. 나의 얼굴에 웃음기가 환하게 띄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내가 몸을 돌려 자리로 가려는데 금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다가오며 말을 건넨다.

「너, 무슨 좋은 일 있니.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

나는 여전히 말이 없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내 자리로 돌아가려는 데 금희의 손이 내 머리에 닿는다. 얼굴이 확 붉어 온다. 심장이 멈추어지는 것 같다. 옮기던 발걸음이 저절로 선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요동도 못한다. 키가 나보다 훨씬 큰 금희가 나를 내려다보고 그녀의 손으로 내 머리를 탁탁 치며 눈을 쓸어내린다.

「아이, 눈 좀 바라. 눈은 그쳤는데 웬 눈이야. 머리 위에.

약간의 바람에 흩날리던 나무 위의 눈들이 정문에 서성이고 있었던 내 머리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바람이 좀 많이 불지, 하는 독백이 절로 튀어 나왔다.

「우리 밖에 나가서 눈싸움 할래.

금희가 내 손목을 잡고 나를 이끌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금희에게 손목을 잡힌 채 밖으로 나갔다. 운동장으로 나간 금희는 눈을 둥글둥글 말아 내게 던졌다. 나는 가만히 금희의 눈을 맞기만 했다. 금희가 소리쳤다.

「너도 나에게 던져 봐. 바보같이 가만있지만 말고.

 

금희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운동장 안에 힘차게 울린다. 나도 눈을 말아 금희에게 마구 던진다. 눈 덩이가 금희에게서 내게로, 내게서 금희에게로 수없이 왔다 갔다 한다. 눈을 흠뻑 뒤집어 쓴 금희와 나는 마주보고 서로 환하게 소리 내어 웃고 있다. 우리는 발자국이 없는 운동장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눈 위에 눕는다. 일어나 뒤를 돌아다보니 우리 둘의 눈 사진이 나란히 진하게 박혀 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소리 내어 크게 웃는다. 그런데 갑자기 금희가 누군가에게 이끌려 운동장 밖으로 사라지고 있다. 내게 손을 흔드는 금희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나를 손짓으로 부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점점 금희의 모습이 희미해지고 멀어져 간다. 금희의 모습이 눈같이 하얗게 변하면서 눈 속으로 사라진다. 깜짝 놀라 금희야, 하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다. 선잠을 자다가 꿈을 꾼 것인지, 환영을 본 것인지, 상상 속에 있었던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금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금희가 사라졌다. 이것이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그동안의 내 경험상 육감을 매우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교통사고를 육감으로 인지했던 것과 자동차 사고를 내 육감으로 사전에 예방한 결정적 사건이 있다. 그 이외에도 결혼을 약속하고도 파혼하리라는 육감 등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육감의 다양한 경험들이 있다. 그러기에 금희가 사라졌다는 것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빗소리는 창문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간밤에 여러 번 잠을 깼다. 밤이 너무도 길었다. 소풍을 앞둔 어린 학생들의 설렘이라고나 할까. 깊은 잠이 오지를 않았다. 자다가 일어나 밖을 보면 비가 오고, 자다가 일어나 또다시 밖을 보면 비가 왔다. 어제 저녁부터 내린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이러다 갈 수 없는 거 아니야, 하는 애탐이 밀려왔다. 이번 전국적인 장마로 이미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만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전국의 주요 도로가 끊겨 차량 통행이 금지되었다. 지난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장마는 앞으로 일주일간 더 지속된다는 각 방송사의 일기예보가 계속되었다.

「나, 내일 강릉에 갖다 올께.

「무슨 일로요?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있어.

「지금 고속도로와 국도 등 모든 도로가 마비되고 있는데.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니 좋아지겠지.

「그래도 그렇죠. 장마로 온 나라가 난리인데. 이 폭우 속에 강릉엘요?

「고등학교 때 담임이 강릉에 살아. 그래서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

「이상하네요. 이런 폭우 속에 동창회라.

아내는 장마 때에 강릉에 갖다 오겠다는 나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 꼬치꼬치 캐어물었다. 나는 붉어 오르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아내를 따돌리느라 진땀이 났다.

 

그녀는 동갑내기들에 비하여 키가 훨씬 컸다. 얼굴은 연한 구릿빛에 동그라며, 까맣고 생글 생글한 눈동자는 마치 광채가 나는 것처럼 빛났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는 그녀의 큰 키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은 매우 쌀쌀 맞아 보였고 도도하기까지 했다. 목소리는 떡갈나무의 넓은 잎사귀에 형성된 아침 이슬방울이 굴러가는 것처럼 깨끗하고 또렷했다. 공부는 최 상위권에 랭크될 정도로 잘했고 달리기도 잘했다. 특히 긴 다리 때문인지 장거리 달리기에 매우 능했다. 그녀는 모든 학생들의 우상이자 애인이었다. 나와 같은 빡빡머리에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는 시골 촌뜨기들에게는 일방적인 사랑이자 우상이었다. 나는 감히 그녀 곁에 있을 수도 없었고 그녀에게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다만 멀리서 동경할 뿐이었다. 그녀는 모든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나는 산간벽지에 살았고 그녀는 읍내에 살았다. 그녀는 항상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기라도 하듯 교실을 활보했고 모든 학생들은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 집중했다. 그녀는 매사에 자신감을 갖는 당찬 학생이었다. 그녀를 그녀이기에 한 것은 읍내에 사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며 달리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그녀이게 한 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이었다. 경쾌한 걸음걸이, 자신감 있는 태도, 쌀쌀함, 도도함, 독수리 같이 사람을 노려보는 집중력.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휘두를 때는 모든 학생들의 시선도 그녀의 머리카락과 함께 움직임을 같이 했다.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

「이유는 뭔데.

「미인박명이란 말이 있잖아.

「그게 이유야?

「아름다운 사람들은 신이 독차지 하고 싶어 한데. 그래서 일찍 죽는가봐.

「너무 안 되었네. 신이 그녀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질투 하나봐.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하지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

「그러게. 너무 예뻐도 안 된다니까.

「참 안 되었네.

이따금씩 그녀에 대한 환상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들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녀에 대한 소식이라곤 소문으로만 들려왔다. 그녀가 이사를 간 관계로 나와는 다른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 중학교에서 또 다른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애기가 들려 왔었다. 이유는 그녀를 사이에 두고 같은 중학교 남학생들 끼리 벌이는 그녀 쟁탈전이 폭력 양상으로 번지면서 학교 문제가 되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의 아름다음은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본의 아니게 몇몇 중학교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애기가 간헐적으로 들려왔었다. 그녀에게 실연 당해 자살한 남학생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삼각관계에 끼여 그녀가 칼침을 맞았다는 얘기도 들리긴 들렸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소문들은 마치 전설처럼 퍼져 나갔다. 그 일대의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은 널리 회자 되었다. 이것이 그녀에 대한 중학교 때의 소문이라면 고등학교 때에는 더욱 황당한 소문이 돌았다. 황당한 소문이지만 완전한 거짓일수도 없는 가능성이 있는 소문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등학교 때는 더욱 극에 달했다. 그녀를 가르치던 선생들이 그녀를 사이에 두고 사랑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 선생 하나가 학교를 그만두었고, 다른 선생은 폭력을 행사한 관계로 감옥엘 갔으며, 그녀와 하룻밤을 잤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또 다른 선생은 미국으로 도망을 갔다.

도대체 그녀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길래 선생들까지도 난리를 치는가. 학생들의 궁금증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들도 야단들이었다. 벽지 학교인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 남자 선생들의 지원이 넘쳐난 적도 있었다. 그녀는 결국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서울로 전학을 갔다. 이것이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소문이었다. 제자와 결혼한 내 친구의 경우를 본다면 이러한 소문들이 전혀 뜬금없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동심에서 그녀를 매우 좋아했다기보다는 동경했다. 그녀의 이미지가 환상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동심이후 그녀가 나의 생활에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는 아니했고 그녀의 환상적 이미지와 이름 석자가 나에게 각인이 되어 있을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의식 세계에서는 감정적으로 그녀가 내게 다가온 적은 없지만 무의식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원형 또는 나의 이상형으로 그녀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토요일 저녁의 전야제를 시작으로 그 이튿날 일요일까지 계속되는 동문회 체육대회가 모교인 동강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있었다. 토요일 저녁 어스름이 있는 시간에 운동장에 도착한 나는 흥분의 절정에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만난 친구들도 있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들도 있었으며 그동안 살아오면서 종종 왕래를 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난 친구들은 그 얼굴이 가물가물 할 뿐이었다. 이름을 댈 때야 비로소 어렴풋이 친구가 생각났다. 특히 여자 아이들의 얼굴은 거의 기억해 내기가 힘들었다. 이름을 대어주어도 가물가물 했다. 술잔도 돌아가고 기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금희다.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희야! 금희야! 금희야!...... 친구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달려들어 얼싸안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몇 발짝 달려가다가 멈추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달려들어 손을 잡고 소리쳤다.

「너 금희 맞니. 금희 말이야.

「응.

「네가 금희야?

「금희 맞다니까. 넌 누구니?

난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땔 수가 없었다. 꼭 잡은 그녀의 손을 놓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금희는 죽었는데, 금희는 죽었는데. 혼자 몇 번이고 중얼거리면서도 차마 너 죽지 않았었니? 하는 말은 내 뱉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 아를 연발하며, 나는 한참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슴에 손을 대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친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금희를 보니 내 심장이 멎는 것 같구나.

친구들이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또 소리쳤다.

「난 금희가 요절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살아 있었네.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웃음소리는 학교 운동장을 향해 퍼져갔다. 나는 그녀를 향해 내 심연의 소리를 냈다.

「너는 내 환상의 여인이야. 지금 이 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아침 여섯 시 삼십분을 기해서 강원도 지방에 호우 경보가 발령되었다. 베란다 밖 창문을 통해 들리는 빗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내리나.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한 장맛비를 원망하며 일기예보를 주시했다. 폭우는 남부 지방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강변북로 양방향, 올림픽대로 양방향의 통행제한이 풀리고 영동 고속도로의 통행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강릉행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되었다. 차비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당신도 참 대단하시네요. 전국이 장맛비로 난리인데 강릉행을 고집하시니, 하고 아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제 얘기했잖아, 동창회 모임이라고. 얼버무리듯 대꾸하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배웅을 하며 새삼스럽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올림픽 대로를 진입해서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중부고속도로를 거쳐 영동고속도를 달렸다. 도로 바닥과 자동차 지붕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요란한 소리를 지르는 소낙비는 마구 나를 앞으로 내밀고 있다. 만물을 쓸어버려 아파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수마가 지나간 상처 위에 새로운 것을 건설해야 하는 것처럼 비는 내 안의 쓰레기를 모조리 쓸어 내버리고 있다.

동심의 환상을 맞이하기 위한 정신적 준비를 하기 위한 것처럼. 정신이 맑아 왔다. 깊은 산중에서 졸졸 소리 내며 흐르는 골짝의 물처럼. 묘한 흥분이 찾아왔다. 새로운 설렘이 찾아왔다. 새로운 인생이 찾아오고 있다. 새로운 힘이 생겼다. 알 수 없는 경건함이 내 가슴을 노크하고 있다. 나는 신발 끈을 새로이 고쳐 메어야 했다. 몇 년 사이의 방탕한 생활들이 잠시 떠오르더니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빛이 강하게 비추니 어둠이 없어지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나의 환상은 아주 깨끗하고 거룩하며 유용함과 아울러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환상을 이상으로, 이상을 현실로 바꾸기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말라 있다. 깨끗함에. 거룩함에. 새로운 창조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에 목말라 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나는 행복했고 우리는 행복했다. 어린이와 같은 동심에서 우리는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남자를 남자로 보지 않았으며 여자를 여자로 보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음탕하지 않았으며 섹스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냥 있어 주기만 해도 고마웠다. 손잡고 춤추고 마시고 얘기하고 모두의 얼굴에 순함과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이 묻어났다.

 

강릉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강릉시내를 달리고 있다. 이십분 정도 시내를 통과하여 경포대에 들어서고 있다. 길거리에는 벚나무 가로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가로수 길을 따라 한참을 따라 들어가니 오른쪽에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다. 장맛비가 통상 그래왔듯이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장대비가 시야를 가린다. 자동차의 와이퍼를 빠르게 돌려보지만 너무도 강한 소낙비라 별로 효용이 없다. 차선이 보이지를 않는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조심하세요, 하고 던졌던 한마디가 괜히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얼마 안가서 약속 장소가 다가옴을 알리는 표시가 장대비 속을 뚫고 어렴풋이 보인다. 자동차의 속력을 약간 줄이고 밖을 이리 저리 살피는데 호수를 등에 업은 어떤 여자가 우산을 쓰고 손을 반쯤 들고 서 있었다. 순간 금희라는 것이 직감되었다. 그렇게 동경했던 동심의 금희다. 마음이 달떠 온다. 신비스러운 그녀가 바로 앞에 다가온다. 동심의 환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 <이금희>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있다. 꿈의 이름 <이금희>,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항상 꿈꾸어 왔다. 새로운 꿈을 꿀 것이고. 그 꿈을 이룰 것이라고. 그런데 그 꿈의 실현을 알리는 동력이 찾아왔다. 몸이 가벼워진다. 하늘을 향해 튀어 오를 것만 같다. 요절했다고 믿었던 그 이름이 소생하여 내 꿈의 동력이 되고 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소리가 들렸다. 찰싹, 하는 물을 때리는 소리도 들렸다. 내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꼬르륵, 꼬르륵, 물이 스며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금희야, 금희야.

 

칠흑 같은 밤이다. 첩첩 산중이다. 강물의 흐름소리가 신비스럽게 들려온다. 동강의 상류 깊은 산중에서 도심의 피로와 긴박함은 꼬리를 숨긴지가 오래다. 사방을 둘러싼 높은 산봉우리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할 만큼 하늘에도 짙은 어둠이 넓은 치맛자락을 펼쳤다. 첩첩 산중 칠흑의 밤에 천연 자연의 기운이 온 몸을 감싸니 머리가 한없이 맑아온다. 폐로 스며드는 천연 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마치 내 자신 신선이 되어 하늘을 나는 느낌이다. 동창생들의 희희낙락 떠드는 소리,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소리가 깊은 산중 천년의 침묵을 깨뜨리고 있다. 금희가 동창생들의 대열을 조용히 빠져나와 강가를 거닐고 있다.

 

이금희, 이금희 ……

 

나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되새겨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아니했다. 요절했다고 믿었던 그녀가 버젓이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있다. 자꾸 금희에게로 가는 내 눈길을 막을 수가 없다. 나도 동창생들의 대열을 조용히 빠져나와 금희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그녀의 산책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멀찌감치 따라간다. 저 얘가 정말 금희인가. 정말일까. 내가 귀신에게 홀린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데 금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금희> 이름 석자만이 빛을 내며 강물에 떠 흘러가고 있다. 그것을 따라가는 내 가슴에 그 빛이 비추고 있다. 나는 그 빛을 따라가며 소리쳤다.

 

금희야, 금희야 ……

「야, 정신이 들어. 나 여기 있어. 여기 있단 말이야. 왜 불러.

어떤 여자가 내 곁에서 안절부절 걱정스러운 눈치로 나를 도닥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여기가 어디예요?

「병원인데. 천만 다행이다, .

내가 지금 꿈을 꾼 거야, 회상을 한거야. 꿈과 회상의 경계가 모호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옆에 있던 그 여자의 말에 의하면 내 자동차가 자기 바로 앞에서 급하게 서는가 싶더니 바로 뒤따라오던 관광버스가 내 차를 받아 내차가 호수 안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차량의 차체가 에스자로 되어있고 의자의 안전장치가 완벽해 버스의 추돌시 충격을 대량 흡수하여 차량은 거의 다 망가졌지만 인명에는 별다른 위험이 없어 천만다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석간 문화일보을 내게 내 밀었다. <강릉 경포대에서 폭우 속 버스의 승용차 추돌사고>를 알리는 사회면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오른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나는 병실에서 초등학교 졸업이후 환한 곳에서는 처음으로 금희의 얼굴,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를 금희라고 소개하는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자세히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나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 금희와의 만남이 꿈인지 현실인지, 상상인지 환영인지가 도대체 구별되지 않았다. 어떨 때는 현실 속에, 어떨 때는 상상 속에, 어떨 때는 환영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술을 먹으면 정상으로 돌아 올 것 같아, 아니 그냥 술 생각이 마구 치밀어 혼자 술집에 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현실 세계에 있는지.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그동안 꿈을 꾸고 있었다고. 금희의 이름은 생각이 나는데 금희의 얼굴이 도저히 기억이 나지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금희의 얼굴이 떠오지를 않았다. 분명히 현실을 경험한 것 같은 데, 그리고 상상의 세계에서나 꿈에서 또는 환영으로 본 금희의 얼굴을 직접 본 것 같은데, 그녀의 얼굴이 도저히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그녀의 이름 <이금희> 석자만이 선명하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눈앞에 아른 거렸다. 그 이름만이 강물위로 흘러가며 환한 빛을 내 마음에 비추고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결론을 얻은 것이 내가 꿈을 꾸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처럼 생생한 꿈, 현실 같은 꿈은 처음이다. 이런 꿈도 다 꿀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나는 내 이야기를 대학동창인 서강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김민기에게 털어 놓았다. 그랬더니 김민기도 그런 경험이 있다며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동심의 사랑 금희에 대한 생각을 너무 골똘히 한 나머지 현실 같은 상상과 환영이 순간적으로 나를 지배했으며 그런 꿈을 꾸게 되었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다. 그래도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아 내 정신이 온전한지를 검사받기 위해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갔다. 담당 의사는 내 얘기를 모두 듣고, 그리고 신체적 건강 상태에 관한 정밀검진 자료를 넘겨받아 뇌 신경계의 검진 자료와 비교 분석을 하더니 한 번 더 나에게 다짐하듯 질문을 던졌다.

 

「금희라는 여자 분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지 않는단 말입니까?

나는 확신에 찬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예」

내 대답을 들은 의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명쾌하게 큰 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 웃음은 자신의 의술 실력이 또다시 입증되었다는 자신감의 발로에서 우러나오는 통쾌한 웃음처럼 보였다.

⌜당신은 지극히 정상이며 그동안 당신은 꿈을 꾸고 있었소.

심리학 박사인 친구를 만나고 전문 병원에서의 검진을 통해 나는 내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결론을 얻은 후에도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심리학 박사인 내 친구 김민기 교수와 세브란스 병원 정신과에 전화를 하려다 그 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어쩌면 내가 친구를 만나지 않았거나 병원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혼란스런 정신 상태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내 정신이나 심리 상태를 테스트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나는 정신병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태에 만족한다. 이대로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만. 이대로만. 너 나아가면 나는 미친다.

 

죽음의 문턱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인간이 외친다. 실재(욕망)와 현실의 경계 선(), 아지랑이 되어 내 앞에 아른거린다, 영원한 동반자로서. () 너머 선(), 박쥐 되어 찾아와 엉겨 붙는다, 빛에 놀라 도망간 그 자리, 불타버린 잔해 모습. () 위를 걷고 싶다, () 넘기 일 센티미터 전() () 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