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여자들

팜므파탈 아나운서와 중년 남자의 위태로운 사랑

악나라 수호자 2023. 10. 30. 12:30

그림자에 이끌려 참석한 어젯밤 미사 내내 볼을 적신 눈물. 거리를 걸어도 노래를 불러도 불을 끄고 누워도 주체 되질 않았어요. 곁에 있지만 헤어진, 참 희한한 이별이 실감 되었어요. 먼 훗날, 푹 꺼진 가슴과 아뜩한 현기증과 눈물을 대신할 아스라한 추억이 떠오를 때. 고즈넉한 어딘 가에서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하는 꿈을 꾸어요.

 

고요가 왔나, 잊었나 했는데 어느새 불어 닥친 한 바탕 소용돌이. 허공을 날고 싶은 환한 충동. 이젠 못 보나요? 나 때문인가요? 마음이 무거워요. 선거 때문이라 믿고 싶은데. 변한 건 없어요. 있던 그 자리에 서성거려요. 변한 게 있다면 빅뱅으로 휘영청 드러난 마음. 오더라도 강요는 말아 줘요. 잊으라고. 그대가 차지한 내 맘속 깊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네요. 그대 오는 날, 내가 있을지, 없을지. 고요와 소용돌이를 넘나드는 마음이라. 있으면 반갑게 인사를. 없으면 다행으로. 절실한 건? 떠들고 웃고 놀고 싶어요. 롯데월드 스타일로. 딱 한 번. 당신과 함께.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기호들. 바람이 안아주며 말해요. 오늘 슬퍼 보여! 헤라씨! 어디에 있든 파이팅!

보고 싶음 때문도 사랑의 감정 때문도 아니었어요. 순전한 부담감 때문에. 수영해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어요. 찜찜한 구석. 감출 수 없었지요. 선거 때문일지 모른다고 애써 자위했지만 나 때문일 거라는 믿음 또한 가시질 않았지요. 명치에 뭔가가 걸린 듯 먹먹한 나날들이었는데…소스라치게 놀랐고 반갑고 고마웠어요. 물속이 아니었다면 표정 관리가 쉽지는 않았겠지요. 태초에 한 점이 있었고 빅뱅이 있었고 우주가 시작되었다지요. 비 온 뒤에 땅은 굳고 생명이 솟아난다지요. 망설이다가, 망설이다가 문자 하네요.

 

불편해요. 수영장 나와 주면 안 되나요? 간절한 바람이에요. 나에 대한 아저씨의 그 마음 때문에 함께 수영 못해요!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말하면 해답이 없어요. 마음이라는 게 정리하라고 정리되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 때문에 수영장 못 나오신다면. 난 죄인일 수뿐이 없고. 내가 이 지역에 있는 한 죄인으로 수영할 수뿐이 없어요. 우리 사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빅뱅이 있었지만, 헤라씨에 대한 좋은 감정. 변한 게 없어요. 내게 죄가 있다면 그것뿐. 나오신다면 조심할게요. 충분히 배려할게요.

 

어저께 자연스레 자리가 마련되면 쏠까 했어요. 월요일, you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얼핏 떠올랐지요. 또 만날 수 있을까. 힘들겠지……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둘이 만난다는 건 천지가 개벽해야 가능할 거 같고. 하하. 해서, 여럿이 한잔하고 싶었어요. 기분 좋게. 돈이 굳어 세계 4대 뮤지컬의 하나인 미스 사이공을 예매하고도 말도 못 꺼내요. 함께 보자고. 토요일 오후 2시인데. 사실 많이 미안했어요. 저 때문에 마음고생 한 거 같아서… 질투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봐요. 순박한 you는 질투의 호들갑에 더욱 놀라고. 질투 삼총사가 무서워요. 하하. 그들을 피하게 됩니다. 그들이 눈이 멀면 좋겠어요. 어떤 경우에도 you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더는. , 청원하나.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강요는 말아 줘요. 잊으라고. 마음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먹먹한 가슴. 터질 거 같아. 고백성사했어요. 부활 전야 미사 후 모인 술자리 몇 명에게. 그 나이에 그런 열정이? 그런 사랑이? 가능해? 소설 쓰려고 꾸며낸 거 아냐? 그들은 충격을 넘어 경악했지만. 반듯한 내 모습보단 참담한 내 모습이 더 인간적이래요. 한 여자의 충고. 잊으려 노력하면 절대 못 잊어. 더 빠져들어. 마음이 흘러가는 데로 버려둬. 울고 싶으면 울고. 보고 싶으면 소리쳐. 보고 싶다고. 산에 가서. 바다 가서. 하늘 우러러. 달 보고. 별 보고. 잊으려 하기보단 다른 일에 집중해 봐. 그게 더 쉬워. 기다려. 시간의 나이테가 늘어날 때까지. 그 여잔 상사병과 그로 인한 우울증으로 안녕을 기도했대요. 방안 가득가득 꽃을 채워 놓고서. 꽃향기에 취함으로써. 이미 다 파 헤쳐진 맘. , 더 숨기겠어요. , 자존심이 남아 있겠어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길… 여자의 치유법은 나도 이미 다 했던 터라. 더 할 것도 없고. 유일한 건 기다리는 것. 미래의 시간을. 아니면 꽃향기에 취해 보는 것.

한때 나를 떨게 했던 신. 그가 싫어한 건 싫어했지요. 요즘 나를 떨게 하는 건 바로 you. 나 때문에 3월 수영을 제대로 못했을지 모른다는 부채감이 스윽 목울대를 넘었어요. 허나 토요일, 수영장 접수대에서 오래 서성이기만 했어요. 혼날 까봐. 못내 아쉬웠어요. 아쉬움은 밤을 타고 아침으로 달려가고. 더이상 서성일 수 없어서. 일요일 오전 117. 전표번호 1026을 받았지요. 부담 갖지 말아요, 제발. 가볍게 넘겨요. 미안한 맘으로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 아저씨, 정말 못 말리겠다, 하며 귀찮아 마시고 눈감아 봐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자연스런 선물들이 질투에겐 색다르게 보이지요. 확인하시고, 선거 때문에 5월 수영, 쉬어야 한다면 연기 신청이나 해 두세요. 불쌍한 날 혼내는 대신. 선거 관계로 5월 등록을 안 할 거 같아 그랬어요. 나를 위해 등록했으니 고마워할 필요도 없어요. , 죽을 고비는 일단 넘긴 거 같아요. 불현듯 덧나는 사랑의 자국이 시리긴 해도. 도와줘서 참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깜짝 놀랐어요. 헤라씨 전화 받고. 신났어요. , 수영장 사람 모두의 관심보단 헤라씨가 건네는 말 한마디를 더 원해요. 근데 전화를 받으니 이유야 어찌 됐든 날아갈 듯 기뻤어요. 내친김에 변명? , 뭇 여자들에게 속옷 사줄 정도로 헤픈 사람 아니에요. 많이 받긴 했어도. 속옷 사줄 정도로 다정다감하지도 않아요. 생각해보니 아내 속옷 한 벌 안 사준 거 같아요. 성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속옷은 왠지 민망스럽고 쑥스러운 거 같아서. 그런 내가 여자의 수영복을 난생처음 고른 건 기적이죠. 용기를 낸 거죠. 원한다면 속옷을 사줄 더 큰 용기도 내야죠. 성당 모임에서 매달 통일 동산을 가요. ‘좋은 사람들이라고 아시나요. 내의를 싸게 팔아요. 사람들이 바글바글. 성당 사람들이 서로 허물이 없어서 속옷을 골라주고 사주기도 해요. 선물 하나 받고 발발 떠는 현대판 신사임당 헤라씨에게 현실을 설명하다 엉뚱한 오해를 받았네요. 헤라씬 물었죠. 왜냐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은 건? 엄밀한 의미에서 이유가 없는 게 이유죠. 백 마디 이유는 사족. 헤라씨의 맘과는 상관없이 난, 헤라씨를 오래오래 마음에 담겠어요. 그 추억도 간직하고 싶고요. 그래서 노력 중이에요. 앞으로의 내 생애에 헤라씨 같은 사람 만나기가? 어려울 거 같아서죠.

헤라씬 좋겠네요. 헤라씰 좋아하는 사람이 또 하나 있어서. 혹시 어저께 3시쯤 수영장 오셨나요? 우리 라인에 박순영씨라고 있죠. 어제 이름을 알았어요. 그분이 날 보고, 친구 왔으니 빨리 찾아오라는 거예요. 내가, 어떤 친구요? 하고 물으니, 좋아하는 사람 있잖아, 하는 거예요. 둘이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어요. 그분도 무슨 연예인 찾는 거처럼 헤라씰 찾았어요.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희숙씨만 찾았지요. 그분도 나처럼 모든 사람이 다 헤라씨로 보였나 봐요. 있는 것조차도 없게 만들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람이 있어서 많은 위안이 되는 하루였어요.

 

일이 터졌네요. 그저께 저녁, 현기증이 심한가 싶었는데 정신을 잃었나 봐요. 깨어났을 땐 병원. 응급구조학과에 재학 중인 아들 덕분에 위험한 고비를 넘겼대요. 퇴원 절차 중인데 중년의 간호사가 말하더군요. 비밀은 지켜드릴게요. 사랑에 빠진 난 귀가 멀었지요. 마음을 접으라는 you의 거듭된 신호를 들을 수 없었으니. 퇴원하면서 떠오른 문장. 용서를 빌어야지. you와 갈등 후엔 상사병이 도졌어요. you의 맘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 내가 깨트리니 you의 맘은 불편했고, 난 상처를 받고. 문제의 근원은 나. you에게 화를 내다니!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요. 못 말리는 나. 지인이 외국으로 가면서 손목시계를 선물했어요. 뇌리를 스친 문장. you에게 줘야지. 정신이 나갔나요. 사랑이 제멋대로 춤을 춰요. 용서하지 마세요. you를 사랑한 죄. 용서하면 사랑의 춤은 계속될 테니까. you의 용서를 받고 아니고를 떠나 용서를 빌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아 금지된 문자를 또 날리네요. 용서를 비는 문자까지도 you에겐 부담이 되겠지만 한 번 더 용기를 냅니다. 미안해요. 화낸 거.

 

, 유를 좋아하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하셨죠. 내가 오히려 도통 이해를 못하는 건, 유의 치명적 아름다움을 유 스스로는 왜 모를까, 하는 거예요. 문자를 자제하겠지만 꼭 얘기하고 싶어서요. 여잔 아름다우면 모든 게 용서되죠. KAL기 폭파범 김현희에 대한 남자들의 재판. 죽이기 너무 아깝다. 결국 살았죠. 유는 김현희보다 더 아름다워요. 유를 보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보다 더한 거짓말은 세상에 없어요. 유를 보고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 남잔 용기와 열정이 제로. 유의 주변엔 용기와 열정 없는 남자들이 바글바글. 나를 빼곤. 쓰러진 내가 이해 안 될 수도 있겠죠. 원리는 간단명료해요.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간격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 상사병은 그 간격이 극도로 벌어졌을 때 와요. 유는 항상 그 자리에 있을 테고. 결국 내가 그 간격을 줄여야 하는데. 그게 될까요?

 

생각이 났는데요. 이문세가 아저씨 닮았어요. , 빵 짱이었어요. 빵을 싫어하는 딸도 만나게 먹더라고요. 입에 완전 녹았어요. 다음 주 월요일, 똑 같은 빵을 수영장 내 사물함에 걸어 놀테니 가져가세요. 사정이 생겨서 어제 복지시설 못 갔어요. 다음 주 일요일 갈 거예요. 희숙이가 헤어지면서 월요일 만나자는 뜻으로 얘기했어요. 유가 영화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맘 있으면 상의해서 연락 줘요. 멜 깁슨 나오는 엣지 오브 다크니스’ (210), 피어스 브로스넌과 이완 맥그리거 나오는 유령작가’(130), 페르시아의 왕자(220) 해요. 보여줄게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어요. 행복한 하루였어요.

 

엇저녁 늦게까지 문자 넣어 미안해요. 너무 늦어서 하지 못한 말, 마지막 문자 넣어요. 미안해하거나 오해하지 말아요. 강습 안 나가는 거에 대해. 헤라씨 때문이 아니에요. 자유 수영 위주로 하려고요. 강습은 한 달에 두어 번만 나가려고요. 외로운 본연의 나로 돌아갈 때가 됐나, 싶었어요. 헤라씨에게 고마움도 전하고, 사랑받고 살아야 할 헤라씨 걱정도 되어 두 가지만 얘기해 주고 싶었어요. 하나는 헤라씨 얘기고, 하나는 헤라씨 남편 얘기. 하나는 확실한 거고, 하나는 남자로서의 특유한 육감이지만 순전한 추측이에요. 그래서 문자하려 했던 거예요. 묵직한 얘기 묵직하게 시작할 수 없어 애교 문자 넣었던 건데, 당황했어요. 그러나 사랑받고 살아야만 할 헤라씨라는 거 익히 알았어요. 헤라씨의 모든 걸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자부해요. 서론이 기네요. 핵심은 믿거나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는 얘기하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헤라씨를 위해 내 그림자를 헤라씨에게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판단을 한 거예요. 지금은 아닌 거 같고, 헤라씨 맘 가라앉고 원한다면 다음에 수영장에서 만나 얘기할게요. 사랑을 떠나 수영장 누구보다도 헤라씨를 진심으로 생각했다는 거,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헤라씨 맘 잘 알아요. 그러기에 수영복을 코앞에 두고 인터넷 결재 창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지요. 눈에 아른거리는 수영복. 헤라씨에게 잘 어울릴 거 같은. 결국 결재했어요. 밤새 고민되었어요. 혼날까봐. 기왕 산 거니 부담 없이 입으면 좋겠어요. 환불받을 수도 없어요. 월요일에 주문한 게 너무 늦게 도착한다고 업주에게 호통을 쳤거든요. 헤라씨 아니면 입을 사람 없어요. 헤라씨 안 입으면 검은 연기되어 허공을 날을 테고, 그걸 바라보는 내 맘 어떨까요. 나에겐 두 가지 소박한 소망이 있어요. 헤라씨를 오래 보는 것. 작품다운 작품 하나 완성하는 것. 헤라씨, 우리 좋은 우정 오래 나누어요. 수영장 친구에게 수영복 선물 받는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면. 헤라씬 달나라에서 온 사람 같아요. 헤라씬 정복자고 난 포로에요. , 좋은 거만 보면 헤라씨를 생각하는 불쌍한 포로에 대한 정복자의 배려를 부탁해요. 사실 전번에 메이커가 아닌 것을 사드려서 못내 아쉬웠었어요. 그땐 수영복에 대해 잘 몰랐었거든요. 헤라씨 내일 두 시 반쯤 기다릴게요. 수영장 로비에서. 제발 이번만큼은 그냥. 부탁해요.

 

아쉽고,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겐 사랑도 우정도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봐요. 행복했어요. 신이 내 행복을 시기 하나 봐요. 금요일 밤 자정 넘어 성당 정원에서 고독한 술을 들이켰지요. 망연한 마음에 눈물이 나대요. 토요일 아침, 두어 시간 수영하고 빵집과 서점과 도서관을 거치는 동안 떠올랐어요. 반 변경. 어디를 가든 헤라씨 생각 많이 날 거예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열정적으로 좋아한 사람이니까. 9월에 반경 해야죠. 남은 한 달, 헤라씨 얼굴 많이 보여주세요. 맘에 담고 새겨야죠. 수영복은 사는 순간 이미 내 것이 아니에요. 임자는 따로 있죠. 좀 더 주인을 기다려 봐야죠. 헤라씨에 대한 야속함이 없는 건 아니지만, 미움은 단 1%도 없어요. 감히 헤라씨를 미워한다, 상상도 못해요. 절절한 추억이니까. 때론 사랑보다 소중한 게 추억이지요.

미인은 괴로워요. 시기와 질투와 음해를 받으니까. 이런 헛것에 굴복하지 마세요. 미인은 당당할 때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죠. 그걸 가꾸세요. 진정한 친구는 그걸 도와주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는 헛것이자 신기루죠. 헤라씨의 모든 걸 이해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난, 스스로를 평가해요. 우리, 볼 날이 많지 않으니 더 잘 지내야죠.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은 질투와 시기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해요. 내 의식은 그 같은 헛것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요. 하지만 헤라씨 의사는 존중할게요. 헤라씬 가 아니니까. 나에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다 이해했는걸요. 경조사 있거나 전화번호 바뀌거나 언젠가 지면에서 날 보게 되면 전화 주세요. 헬스클럽에서 노인을 봤어요. 인대에 염증이 생긴. 나이 들어 고생 안 하려면 근육운동도 미리미리 해 두세요. 헤라씨가 옆에 있어 꿈같은 행복 얻었어요.

 

, 이해해, 해야지, 했고 말고 하면서도, 하면서도 내 방에만 들어서면 정면으로 마주치는, 남자 방에 있으면 안 될, 그래서 책인 것처럼 위장하여 다른 책들 속에 숨어 있는 주인을 기다리는 녀석의 슬픈 얼굴을 볼 때마다 녀석의 자리를 찾아주고 싶은데 하면서도, 하면서도 그것이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서 녀석에게 미안해서, 미안한 맘으로 다가올 것 같지 않은 희망을 얘기하지요. 기다려 봐, 기다려 봐. 그러니까 녀석이 말하길, 주인의 성격으로 봐 나를 찾지 않을 거예요. 난 녀석에게 버럭버럭 화를 냈지요. 기다려 보라고. 화를 내다가 생각해보니 녀석의 말에 맞는 구석이 있어 화내기를 멈추었어요. 화내기를 멈추자 녀석이 용기를 얻었는지 마지막 강펀치 한 방을 날리는 거예요. 내가 주인을 모시지 못하고 책들 속에 숨죽이며 있는 것 자체가 천 마디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미련한 아저씨. 꿈 깨요. 아저씨와 주인과의 우정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서 있질 못하고, 여기 책들 속에 숨죽이며 숨어 있는 그만큼의 크기에요. 녀석의 말에 내가 쓸쓸히 돌아서자 녀석이 울면서 날 세차게 돌려세웠어요.

차라리 날 태워버리세요. 연기가 되어서라도 주인에게 날아가고 싶어요. 내가 말했어요. 내가 다시 한번 얘기해 볼게. 널 데려가라고. 그러나 이내 깨달았어요.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서. 거절할까 봐. 주인의 입장 난처해질까 봐. 녀석을 내민 내 손 무안해질까 봐. ! 하고 절로 튀어나오는 탄성. 이 정도가, 주고 싶은 것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없어 고민해야 하는 이게 우리 우정의 키구나. 생각이 들어요. 아무래도 녀석의 청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다고. 눈물 나네요. 그동안 많이 울었는데 아직 흘릴 눈물이 더 있나 봐요. 녀석의 청을 들어주고 나면 … 난, 나머지 눈물을 흘리겠지요. 녀석의 검은 연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습을 주인이 받아 주었으면 하는 진한 아쉬움에 잠 못 이룬 밤, 밤이 얼마나 흘러가야 할까요. 얼마나 흘러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순수한 열정으로 좋아한 사람이 나를 이해할까요. 나를 이해해서 녀석을 받아 줄까요. 기약 없는 길 끝없는 길만이 펼쳐지고 그 길 위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남자, 남자의 옷깃을 찬바람이 스쳐 가네요.

 

난 달력에서 빨간 글씨를 다 없애버리고 싶어요. ㅎㅎ. 문자를 넣을 수도, 보고 싶은 얼굴 볼 수도 없어서. 한가위 명절 잘 보내라는 문자가 들어 올 때마다 내가 보내야 할 문자는 따로 있는데, 있는데 하면서도 넣지 못하는 아쉬움, 꾹꾹 참아야 하니까. 헤라씨가 내게 내린 뿌리의 끝은 도대체 어딘가, 하는 수수께끼 아닌 수수께끼를 못 풀겠어요. 아직도 문뜩 허공을 날고 싶은 충동과 아뜩한 현기증이 일어요. 다행히 날 이해해 주고 참아주려는 헤라씨 맘이 있어 잘 견디고 있지만. 고맙고 기뻐서 행복해요. 초급반 시절, 알게 된 할아버지가 못처럼 날 만나더니 얼굴 참 좋아졌네, 칭찬했어요. 옆에 있던 여자가 말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대요. 남자들은 아직도 암흑인데. 여자들의 눈치에 경외심을 느껴요. 우리 반에 어떤 여잔 내가 헤라씨를 바라보는 횟수까지 세나 봐요. 왜 그리 헤라씨를 자주 봐요, 하며 웃더군요. 옆 반 여자가 알 정도니 어찌 됐든 소문이 났나 봐요. 섬세한 감정과 현대판 신사임당 같은 성품의 소유자인 헤라씨 입장에서야 부담스럽겠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샘은 만들어졌고 물은 흐르고 샘이 마를 기색은 더더욱 없으니 물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울 거예요. 흐르던 물이 마르면 사람들은 메마른 냇가에 앉아 재잘거리지요. 왜 가뭄이 들었지? 가뭄이 들길 바라는 그들의 바람은 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을 거예요. 혹시 사람들로부터 불편한 말을 듣는다면 모두 내 핑계를 대세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걸 어쩌겠냐고? 물리치려 했더니 상사병과 우울증으로 쓰러지고 죽을 거 같은데, 죽는 꼴을 보고 그냥 내버려 두냐고? 한 생명 건지려고 편하게 대해 준다고. 헤라씨가 듣는 불편한 말들이 있다면 내가 다 짊어지고 갈게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게 내 기쁨이고 행복이에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헤라씨가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언젠가 작품이 나온다면 헤라씨에게 바치고 싶어요. 부담을 갖진 마세요. 헤라씨를 드러내진 않을 테니까. 그러나 헤라씨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는 있을 거예요. 그만큼 헤라씨가 내 인생 중반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네요. 헤라씨, 사랑까진 바랄 수도 없겠지만 우정만큼은 함께 키워가요. 한 줌의 재로 변할 때까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은 성공한 거예요.

 

돈을 잃으면 적게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는 말이 실감 나는 최윤희씨의 자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네요.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고, 먼저 가고 늦게 가는 것만이 차이라 할 수 있겠지요.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자살이, 단명보다는 장수가 더 낫겠지요.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단명하는 일은 드물겠지요. 결국 최고의 선은 무병장수 일진데, 이것을 이루는 최선의 방법은 꾸준한 운동과 스트레스 없는 정신생활이지요. 여기에 감정적 정서적으로 설렘을 유지할 수 있는 동기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요.

2년 이상을 봐 왔으면서도 보면 볼수록 마음이 설레는 대상이 있는 난, 참 행복한 사람이에요. 음식 축제에 갔다가 추억의 홍삼 젤리를 샀어요. 헤라씨 주려고요. 지난 금요일 헤라씨 만나면 주려고 했는데 딱 마주치지 못해서, 보관중이에요. 성당 일이 있어서 강습 못 받고 1시에 자유 수영하고 헬스 했어요. 헬스장에서 헤라씨를 잠깐 지켜봤는데 가슴이 마구 뛰는 거 있죠. 막 뛰어 내려가고 싶었어요. 얘기하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약속만 없었다면 수영 또 한 번 했을 거예요. 참 신기해요. 평생 이런 적도 없었고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고 매번 새롭고 처음인 거 같은 헤라씨에 대한 내 감정, 근원을 알 수 없어요. 너무 깊어서 보이질 않아요. 나도 날 모르겠어요. 어떨 땐 착각해요. 헤라씨가 신이 아닌가, 해서요. 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오랫동안 지배하는 거죠? 감사할 일이죠.

 

헤라씨, 문자 보내고 걱정했어요. 홍삼 젤리 선물을 안 받으셔도 되요. 선물이랄 것도 없어요. 가격도 싸고요. 내가 먹고 싶어 사다가, 헤라씨 생각나서 추가로 샀어요. 돌이켜보니 선물에 대해 헤라씨가 상당히 부담스러워한 거 같아서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요. 안 받으셔도 기분 하나도 안 나빠요. 걱정마세요. 나에 대한 배려, 그동안 충분히 해 주셨잖아요. 그 맘만으로도 충분히 고맙습니다. 노파심에 문자 보냅니다. 젤리 선물 관계로 부담 느꼈다면 털어버리셔요. 조심할게요. 뭔가 주고 싶은 병, 고쳐야 할 텐데. 잘 안 돼서. 나도 답답하네요. 미안해요.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헤라씬, 수영장 계속 다니세요. 내가 반 옮길게요. 오늘 선생님과 일부 회원들에게 얘기했어요. 마침 반 변경 날짜도 다가오고. 오늘 수영 안 하고 그냥 오고 싶었어요. 수영하기 힘들 거 같아서. 억지로 1시간 채우고 왔네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게 어떻게 문제가 됐는지 이해가 힘들군요. 내가 물었던 건 단 한 마디. 헤라씨 왜 안 나왔지? 전화 한 번 해봐. 이게 전분데. 내심은 연락되면 셋이서 저녁 같이 먹고 싶어서 그런 건데. 그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됐군요. 예전에도 말했지만, 질투가 극에 달했나 봐요. 그들이 너무 싫네요. 질투 많은 사람이라서 싫어했지만 헤라씨와 친하니 나도 잘 해보려고 했는데, 이젠 화롯불 같은 그들의 질투심에 질려버렸어요. 남녀 사이의 한계는 있지만 난, 그들보단 몇 배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나만의 생각이겠죠.

쓸쓸하고 눈물도 나고. 황량한 내 맘에 찬바람 소리만 들리네요. 그들의 바람대로 라면 수영장에서 헤라씨와 얘기도 나누지 말고 눈인사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헤라씬 그들의 눈치 때문에 나를 피하게 되고. 문자도 주고받지 못하고. 그럴 바에야 반을 옮기는 게 낫지요. 수영하러 갔다가 애가 타서 죽는 날 보고 싶지는 않겠지요. 홍삼 젤리가 마지막 선물이 될 거 같네요. 어쩌다 우연히 만나지 않고선 날 보기 힘들 거예요. 내가 피해서 다닐 거니까요. 이렇게 몇 개월이 흐르고 1년이 지나고 더 시간이 흐르면 아픈 마음도 정리되겠지요. 시간이 약이라는 데, 어떻게 버텨 봐야죠. 나 때문에 헤라씨 수영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문자 하지 말라는 데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죠. 미안해하지 마시고 잡지도 마세요. 더는 헤라씨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좋은 추억으로 간직할게요.

 

덜 드러내고, 덜 흔들리고, ?????????, 대범하고, 어른스럽고, 카리스마 있게…

헤라씨가 문자 넣은 것 중에서 좋은 말들이 많았지만, 어저께 충고하신 말이 맘에 와 닿았어요.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다르면 색다르게 와 닿죠. , 하루 동안 헤라씨의 말들을 새기고 또 새겼어요. 근데요, 문자를 정리하다 잘못하는 바람에 위 문자를 지웠어요. 세 번째 덜 ?????? 뭔지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알려 주세요. 분명히 뭔가 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여자들 많고, 말도 많고 한 수영장에서 내가 되새겨야 할 좋은 문장이에요. 앞으론 탈의실에서 대기하다 체조 끝나면 들어가 강습받고, 강습 끝나기 무섭게 수영장을 나올 거예요. 이젠 수영장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아요. 분위기상 헤라씨와 말도 못 나눌 거 같은데 굳이 수영장에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어제 희숙이 건 얘기한 거 크게 마음에 담지 않았으면 해요. 문자 보내고 후회했어요.

헤라씨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는데 자칫 오해를 일으킬 거 같아서. 희숙이 같은 결점은 누구에게나 있죠. 좋게 보면 눈감아 줄 수도 있지만, 태클을 걸면 걸리는 거죠. 친한 사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은근슬쩍 비난하는 경우는 허다하죠. 헤라씨가 말 듣는 정도는 누구나 다 들어요. 질투녀들이 나를 욕하는 것처럼. 희숙이 건으로 내게 실망했다면 그 비난은 달게 받겠어요. 사실은 사실이니까. 헤라씨가 희숙이를 너무 감싸서 그랬나 봐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헤라씨가 인기가 많은 거죠. 경숙과 희숙과 나는 그 속을 들여 보면 쟁탈전을 벌여요. 헤라를 서로 차지하고 싶어서. 질투녀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헤라를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죠. 헤라씨, 좋게 생각하세요. 제 불찰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문자라는 게 깊이 생각 안 하면 실수가 있어요.

 

, 내 스타일대로 당당하게 나아갈 거예요. ? 내가 살기 위해. 진정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나뿐이 없으니까. 이건 익숙하게 나를 길들여 온 생활 방식이지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나 봐요. 스캔들이니 뭐니 하면서. 그게 그저 남 얘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이죠. 험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미 물은 흘렀고 흐르는 물을 막을 수도 없고. 억지로 물을 막아 봐야 나만 힘들어서 안 될 거 같아요. 내가 외로운 건 죽을 만큼 힘든 내 마음 상태를 이해해 주려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그게 사랑의 본질이지만. 헤라씨도 나를 이해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스캔들이니 뭐니 하는 것과 내 마음이 비교되는 게 자존심이 무척 상해요. 어차피 소문은 났고. 피하고 쉬쉬하는 게 해결책은 아니지요. 앞으론 기회를 정면에서 맞이하면 엉거주춤하거나 뒤로 숨지 않고 당당하게 밝혀야 하겠어요. 그게 나를 위하는 것은 물론이고 헤라씨를 보호하는 걸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순수하게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냐. 나 죽을 만큼 헤라씨 좋아한다. 잊으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된다. 이런 얘기 안 하면 내가 힘들어서 못산다. 이해하라. 이해 못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일방적 사랑이다. 헤라씨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중학생 시절 제자가 스승을 흠모하는 그런 종류의 짝사랑이다. 그러니 쓸데없이 헤라씨를 물고 들어가지 마라. 헤라씨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친구로 생각한다면 뒷말하지 말고, 헤라씨에게 아무 얘기도 말고 그냥 내버려 둬라. 나에 대해서만 얘 해라. 그건 얼마든지 환영한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문제다. 나와 내가 관계된 문제다, 하고 얘기할 거예요. 그래요.

이건 순전히 나와 내가 관계된 나만의 문제예요. 반을 옮겨서 해결될 문제라면 반을 옮기죠. 반을 옮긴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에요. 반을 옮기면 더 미쳐버릴지 몰라서요. 헤라씨 안 보면 잊혀질까 해서, 나 의도적으로 헤라씨와 만날 시간대를 피합니다. 그런데요. 어저께 본의 아니게 헤라씨 그림자를 봤어요. 맘이 심란해서 밤잠 못 이루었어요. 정면 돌파해야겠다고 맘먹었어요. 이게 날 살리는 길이에요. 날 이해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나라도 날 이해해야죠. 헤라씨에게 피해는 안 가게 할 테니 걱정마요. 미안해요. 나는요. 나 혼자 죽으면 죽었지 친구를 물고 들어가지는 않아요. 이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에요.

 

헤라씨! 훠이훠이 날아가셔요! 동아줄을 끊어 버리고. 자유를 향해 높이, 멀리 날아가셔요. 동아줄을 끊어 주는 게 내 도리인 거 같아요. 허둥지둥, 멍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공황 상태, 파란 하늘의 날벼락 같은, 정해진 끼니를 때우고자 입맛도 없이 꾸역꾸역 쑤셔 넣은 음식은 식도에서 걸리고, 난데없이 약국엘 가야 했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하는 황망한 시간이 흘렀어요. 내게 왜, 그렇게 모질게 대하나요? 그렇게 던져 버리면 난, 죽을 만큼 힘들단 걸 모르시나요? 헤라씬 날 보고, 죽어라, 죽어라 하는 거 같아요, 하고 울부짖는데, 뇌리에서 똬리를 틀며 반경을 넓혀가는 게 있으니 그건, 불편하고 너무 힘들어요, 하는 헤라씨의 음성입니다. 이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헤라씨에게 드려야 할 선물 같네요. 노력할게요. 노력하지 않으면 헤라씨가 다시 운동을 중지할지 모른다는, 좋은 추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서운함과 막막함이 나를 코너로 몰고 갑니다. , 스스로 견뎌봐야죠. 내게 너무 모질게 대하지 마요. 슬퍼요. 눈물 나요. 언젠가 헤라씨에게 큰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한숨 소리도, 불편하고 너무 힘들어요, 하는 거센 파도에 맥없이 휩쓸려 저만치 떠나가네요. 거센 파도도 언젠가 멈추겠지요. 그럼 친구의 목소릴 들을 수 있을 거예요.

도대체 그대는 누구신가요. 그대 말처럼 그만 내버려 둘 때도 된 거 같은데, 그래도 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흘렀는데, 하면서도 하다가도 그대를 보는 순간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정신은 혼미해지고 그대가 기분 좋게 말을 걸어 주고 웃어준 날엔 이삼일은 족히 그 흥분이 가시질 않으니 힘든 건 그대이지만 미치겠는 건 나네요.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얼음장 같은 그대의 속맘이 스르르 열리면 기왓장 부서지듯 조각나는, 사냥꾼에게 포위된 노루마냥 허둥대는 내 맘, 다시 쌓아 올리는 데 일주일은 족히 걸리지요. 그대를 진정으로 위하고 싶은 냉정한 맘에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게요 말을 덜 건넬 게요 불편하게 안 할게요 해 놓고서도 책임지지도 못할 말이란 걸, 아는 데는 하루의 시간도 필요치 않네요. 견딜 수 있겠어? 보고도 안 본 척 할 수 있냐고?

나 밖의 나가 나 안의 내게 나의 거짓을 추궁하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고, 가까이 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발걸음과 맘과 눈동자는 이미 그대 곁으로 향하고 있을 날 용서하고 싶어요. 내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은, 나를 무한히 약하게도 힘없게도 만드는, 삶에 대한 애착과 집중력을 단번에 무너뜨리기도 세상의 황홀함을 느끼게도 하는 그대는 도대체 누구신가요. 그대를 치명적으로 사랑하여 설마, 설마가 아닌 진짜 불치병에 걸린 남자로 추억되고 싶어요.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대가 필요로 하는 그곳, 미안하다는 말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리에 머무른다 해도 내 영혼은 위로를 받을 거예요.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랑받고 살아야 할 여자란 걸 잊지 마세요. 또 다시 운동을 접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시고요. 불편한 맘, 쫙 펴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도와주는 건 기분 좋은 일인데 자꾸 눈물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