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이야기

죄/악도 선이다.

악나라 수호자 2023. 10. 30. 12:45

영세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아니 오래된 사람들조차도 하느님은 왜 죄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얼마든지 죄를 없앨 수 있었을 텐데 왜 죄를 없애지 않았을까. 나 역시도 신앙생활을 해오는 상당한 시간동안 여기에 의문을 가지고 생활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절이 있었다니, 그렇다면 지금은 의문이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다, 라고 말하겠다.

 

가톨릭의 교리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인은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했다. 역으로 말하면 선은 악의 결핍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선과 악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본다. 현실적으로 인간이란 존재는 신의 속성과 짐승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가톨릭이 왜 사형제도에 반대하고 있을까. 가톨릭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형을 당할 만큼 중죄를 저질렀지만 그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신의 속성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은 하루에도 수없이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겉으로 드러난 죄만 안 지었을 뿐, 인간은 매일 죄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가톨릭 대학교 총장이신 임병헌 신부님은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가톨릭에 입문하지 않았더라면 더 큰 죄를 지었을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다행히 하느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일원이 됨으로서 우리는 더욱 죄에 민감하게 작용하도록 훈련된 영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의 죄를 보지 마시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아 달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보신다면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천당 문지방을 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신자들 중에 자신의 내면을 송두리째 드러낼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드러냈다가는 그날부터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죄인이면서도 자신 만큼은 아무런 죄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위선자들의 몰매를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단정적으로, 너무 경솔하게 선악의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다. 선악은 이분법적으로 바라볼 사안이 아니다. 이런 사고에 물들어 있을수록 더 많은 오류와 문제를 일으킨다. 가톨릭의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서양의 전통에서 이라는 숫자는 팽팽한 긴장감의 상징이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완전함의 상징이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이자 유명한 경험심리학자인 칼 융은 좀 더 개방적인 완전함, 여유로운 완전함을 추구하며 사위일체를 주장한다. 바로 사위일체의 한 축을 죄/악이 담당한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라는 숫자는 완전함의 상징이다. 칼 융은 주장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죄를 피할 수 없다고. 죄가 없어지고 배척되어야 할 존재라기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항상 가장 가까이에서 대면해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가톨릭 내에서도 죄악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장이 넓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죄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우리의 일상에서 무슨 역할을 할까. 우리는 죄가 있음으로 해서 선의 가치성을 깨닫는다. 죄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인간이라면 그게 신이지 어디 인간인가.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신 앞에서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여 인간의 나약함과 악함을 이해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무자비한 악함을 경험하셨지만 인간을 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런 인간을 위해 기도하셨다.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했지만 그 제자에게 교회를 세우게 하고 하늘로 가는 열쇠를 그에게 맡겼다. 예수님에게 악을 행한 죄인들은 죄를 뉘우치고 선으로 갈 수 있었다. 죄가 있었기에 선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선은 없고 죄만 있는 인간이라면 그게 짐승이지 인간인가.

 

죄가 없고 선만 있는 인간, 아마 동맥경화로 죽고 말 것이다. 악으로 떨어지고 싶지만 선으로 가야할 할 당위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있기에 삶의 의욕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기계이지 인간인가. 난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 여인을 강제로 갖는다면 그게 짐승이지 인간인가. 난 그런 짐승이 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갖고 싶지만 갖을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는 곳에서 삶의 활기가 있지 않을까. 항상 성공만 한다면 그게 과연 재미가 있을까. 항상 실패만 한다면 과연 살아갈 수 있을까. 성공했지만 실패하지 않으려는 긴장감이 있기에, 실패했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삶의 윤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코너에 몰릴 정도로 돈이 없어 도둑질을 하고 싶은 충동 속에서 일터로 발길을 힘차게 돌리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을 때 살맛이 나지 않을까.

 

산 물고기를 실은 두 배가 대서양을 횡단해 항해를 시작했다. 한 배의 어항에는 모터를 돌려 어항에 파도를 일으켰다. 다른 배에는 모터를 돌리지 않고 잔잔한 수면의 형태를 유지했다. 장시간의 항해를 마치고 어항을 열었을 때 상반된 변화가 일어났다. 모터를 돌린 배의 물고기는 모두 살아 있었지만, 모터를 돌리지 않은 배의 물고기는 모두 주었다. 모터를 돌려 파도를 일으킨 배의 물고기는 파도를 헤치며 살아갈 힘을 얻었으나 잔잔한 수면하의 물고기는 살아 갈 힘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실화가 있다. /악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지만 결코 배척되지 않는 선을 위해 있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선이다. 음양의 이치와 선악의 이치는 일맥상통한다. 양자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체로 생각되어 할 존재다. 음양과 선악의 이치를 긍정적 방향으로 전환할 때 인생에서 있어서 매순간 햅쌀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