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이야기

천주교에서는 조상께 절을 못 하나요? 처음 들어봐요.

악나라 수호자 2023. 10. 28. 13:32

지난 추석을 보내면서 일부 교우들 사이에서 새삼스럽게 갑론을박이 있었다. 천주교 신자가 조상께 절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해. 좀 의아해했다. 아직도 조상께 대한 절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하는 교우들이 있구나, 하는 시대착오적 발상 때문이다.

 

나는 19861212일에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노틀담 수녀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교리 기간 중, 별 문제의식이 없이 교리만 열심히 받았다. 그런데 세례식 하루 전에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조상께 절을 해도 되는 건 지에 대해. 담당 수녀님에게 질문했다. 맘속으로 절을 못하게 하면 세례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조상께 절을 못 한다는 건 상상해 보질 않았으니까. 당시 종신 서원한 지 20년이 넘은 수녀님께서,

 

당연히 해도 되지요. 다만 조상을 신격화하지 않는 게 좋아요.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추어 공경하는 맘으로 절을 하는 건 좋은 일이예요,

 

하고 대답했다. 그 후 집안의 제사가 있으면 당당하게 절을 했다. 천주교 신자로서 절을 할까, 말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나 갈등한 적이 없다. 레지오 활동 경력 30년 이상이다. 레지오 활동으로 상가 방문과 연도를 많이 한다. 당연히 고인께 절을 한다. 대부분 레지오 단원들이 고인께 절한다. 지난 추석을 지나면서 조상께 절을 해도 되는지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다음은 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 연구소) 10(7684p-7685p) 요약이다.

 

1939128일 교황청은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공경 의식을 전면 허용하고, 조상 제사에 대해서는 전면적인 허용이 아니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 같은 해 7월 한국 주교단은 <조선 8교구 모든 감목의 교서>을 발표하여 조상 제사에 대한 교황청의 허용 조처를 교회의 신앙 도리가 변함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도리는 만세에 불변하는 진리이며 다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 제사에 대한 현대인의 정신이 변했기 때문에 용납하는 것에 불과하고, “교회는 항상 어느 지방의 관례가 교회 신덕 도리에 분명히 위반되지 않으면 이를 금한 일이 없다.”라고 언명하였다.

 

1958년 한국 주교단은 라틴어로 간행된 <한국 교회 공동 지도서>에서 제례와 상례에 관한 일반적인 원칙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허용 의식과 금지 의식의 목록까지 제시하였다. 허용 의식은 시체나 죽은 이의 사진이나 이름만 적힌 위패 앞에서 절을 하고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 등이며, 금지 의식은 제사에 있어서 축문(祝文), 합문(闔門), 장례에 있어서의 고복(皐復), 사자밥, 반함(飯含) 등이다.

1984년 한국 교회는 창설 200주년을 맞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교회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목회의를 개최하였다. ……………………사목회의는 현대적이고 한국적이면서 그리스도교적인 제례예식을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하였다.

 

…………십자가를 걸고 그 밑에 사진을 모시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정성의 표시로 꽃이나 음식을 진열할 수 있다. 고인의 신상인 신주나 지방(紙榜)은 사진으로 대치하고, 합문은 묵념으로 하며, 축문은 생시에 직접 말씀드리듯이 고인에게 간절한 사모와 효성의 마음을 표하는 위령문으로 함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제사 형식에 따라 조상제사를 지내야 하는 가정에서는 지방을 모시고 축문을 읽는 것도 허용됨이 요망된다.”

 

상기의 발췌문에서 언급되었듯이 교회 대개혁의 시발점인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훨씬 이전인 1939, 교황청은 이미 조상 제사 문제에 대한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고, 한국 교회는 이에 부응하여 1958, 조상께 절을 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지방을 모시고 축문을 읽는 것도 허용하였다. 다만 주의할 것은 지방을 쓸 때 조상을 신격화하는 어휘는 빠져야 하겠다. 교회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조상을 공경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충분히 수용하지만, 조상을 신격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은 상식적으로도 맞다. 조상이 신이 될 수는 없다.

 

지난 추석을 지나면서 때아닌 조상께 절하는 논쟁으로 아쉬움의 흔적들이 있었다. 성당의 좋은 전통과 관례는 지켜주는 게 낫다. 좋은 전통과 관례를 지키는 것은 어렵다. 없어진 것을 되살리기는 더더욱 어렵다. 더더욱 어려운 것을 하기보다 덜 어려운 것을 지키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쉽게 얘기한다.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죽은 다음에 울고불고해야 무슨 소용이냐고? 그 말이 맞긴 맞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산 자의 몫이니까. 죽은 자를 위한 제사이지만 동시에 산 자를 위한 제사다. 정성껏 무릎 꿇고 조상께 머리를 숙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죄의식, 미안함, 깊은 연민. ‘무릎을 꿇는다.’ 이건 겸양과 속죄의 극대화된 모습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 산 자는 자신이 치유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일터로 가는 발걸음에 창조적 힘을 부여받기도 한다.

 

성교회는 신앙이나 공익에 관계없는 일에 엄격한 통일성을 강요하고자 하지 않으며, 전례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오히려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이를 보호 육성 한다. 또한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진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만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 그것들이 참되고 올바른 전례 본정신에 적합하다면, 때로는 전례 차체에도 이의 도입을 허용한다.(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제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