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자서전

캐나다에서 온 편지 - 딸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아버지

악나라 수호자 2023. 10. 30. 11:26

자식이 성장한다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져 가는 과정이다. - 두 철로가 점점 멀어져 가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면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부모, 특히 아버지와 자식간의 숙명적 관계다. 이것을 체화시키는 영혼은 자유롭다.  

 

혜진에게 !!

 

1. 헬스클럽에서 운동 끝나고, 정오쯤 건물 1층 로비에서 스마트 폰으로 메일을 열었어. 성혜진, 이란 이름과 아빠에게, 란 수신인을 보고서 눈물이 순간 왈칵 쏟아졌어. 아마 이 순간의 눈물은 반가움과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을 거야. 누군가 볼까봐 건물 구석으로 옮겨 가서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어. 계속 울었어. (아빠가 원래 눈물이 많아. 세례받을 때도 울었고, 결혼식 때도 울었고, 성모님 관련 행사하다가 울고 등등. 그러나 솔직히 눈물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겠어. 영성 지도자들은 참회의 눈물, 기쁨의 눈물, 슬픔의 눈물 등등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맘이 야물지 못하거나 정이 많아서 그렇다고도 하는데, 솔직히 왜 눈물이 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건물 구석에서 혜진이 편지를 읽어 내려가면서는 계속 흐느끼며 울었어. 이때의 눈물은 처음에 흘렸던 반가움과 기쁨과 안도의 눈물은 아니야.

 

2. 거리를 정처 없이 걷다가, 중식당에 들러 짬뽕을 시켜서 먹으려다 체할 거 같아 국물만 몇 숟가락 뜨다 식당을 나왔어. 시장을 둘러보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 혜진이의 상처가 깊구나, 아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충격적인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됐구나, 생각했어. 어저께 수원 비행장으로 (오빠가 군대 가고 난 후 처음으로) 면회 갔었는데(오빠를 면회하러 가게 된 배경도 혜진이 때문이었어. ) 오빠도 혜진이와 거의 똑같은 말을 했어. 오빠와 말을 맞추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혜진이의 이야기들은 오빠와 비슷해.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이야기가 실제로 혜진이나 오빠에게서 일어난 것을 보고서 아빠는 생각이 많았어. 어떻게 해야 하나,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집엘 들어왔어.

 

3. 집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켜고 다시 메일을 열어 읽으려는 데 두려웠어.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뜯어가면서 정확히 읽어 내려갔어. 눈물이 계속 흘렀어. 다 읽고 난 후, 누가 볼 사람도 없는 방에서 아빠는 난생처음(괴로움과 슬픔과 통한 뭐, 이런 게 뒤범벅되어 소리치고 우는 그런 종류랄까) 혼자서 이불을 뒤집어쓰다가도 쥐어짜다가도 하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 이런 생각이 들었어. 보고 싶어도 기다릴 수뿐이 없구나. 기다릴게. 앞으로 아빠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조그만 상처라도 안 주도록 노력할게. 자판기를 두들기는 지금도 눈물이 멈추질 않네. 상처를 준 사람은 기억을 별로 못해. 하지만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것을 평생 기억해. 아빠가 만나는 성당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봤어. 아빠가 말할 때 상당히 신중하거나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가족이라고,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힘없는 아이들이라고 정말 함부로 대했구나, 새삼스럽게 생각이 되네. 아빠가 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성당 사람들을 대했더라면 사람들이 아빠를 떠났을 거야. 그동안도 이런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지금에서 다시 한번 이성적으로 생각하니 참, 아이러니하네.

 

4. 아빠가 혜진이와 오빠와 떨어져 있고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혜진이나 오빠의 동태를 항상 파악하고 있었어. 혜진이가 휴학한 거를 오래전에 알고 있었어. 신소재 공학과로 전과한 거도 알고 있었고. 길을 걷다가 우연이라도 혜진이를 좀 볼 수 없을까, 기대했지만 전혀 보이질 않았어. 걱정은 항상 했지만, 맘만 있지 여유가 없어서 경제적으로 도와줄 엄두는 내지 못했어. 그렇게 저렇게 2년 정도가 흘렀잖아. 일주일 전쯤인가? 모르는 성당 사람에게 문자가 왔어. 형제님, 성사표를 성당 사무실에 맡겨 놓을게요, 하고 말이야. 뜬금없는 문자라, 궁금했어. 성사표를 혜진이네 집으로 배달하질 않고, 왜 내게 연락했을까. 아직 성당의 우리 집 주소는 내자동이고, 교적도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있을 텐데,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 (혜진이도 기억하겠지만 일단 교적을 함께 쓰고, 교무금은 엄마가 내기로 했잖아. 이건 엄마가 동의한 것으로 혜진이도 알고 있잖아. 변동이 생기면 꼭, 아빠에게 연락을 달라고 아빠가 부탁한 거도 기억나지.)

 

아빠가 궁금해서 엄마에게 문자를 넣었어. 왜 이런 일이 있는 건가? 어디 이사 갔는가? 교무금은 잘 내고 있는가? 상황이 어려우면 내가 낼 테니까 그 상황을 상세히 얘기해 달라. 혜진이와 오빠 소식도 좀 주고. 이런 아빠의 문자에 대해, 하루가 지나서도 엄마는 답장을 안 했어. 전화도 안 받고. 아빠는 갑갑해서 내자동 집으로 찾아갔는데, 텅 비어 있었어. 깜짝 놀랐어. 부랴부랴 혜진이에게 전화했어. 고객의 사정으로 통화할 수 없다는 멘트가 나왔어. 몇 번을 눌러도 마찬가지. 국민대로 전화했어. 휴학 상태야. 문제가 생겼구나, 했어. 불안했어. 걱정도 커지고. 엄마와 혜진이가 싸워서 어떻게 된 건가, 혜진이가 집을 나간 건가. 엄마보단 혜진 걱정이 당연히 더 크지. 할 수 없이 엄마에게 다시 한번 문자를 넣었어. 혜진이가 엄마를 따라갔으니 혜진이를 잘 돌보리라 믿겠네, 이런 내용의 아주 간단한 문자였어. 그래도 엄마는 답이 없었어. 하루가 또 지났나, 안 지났나 모르겠지만 이번엔 장문의 문자를 또 넣었어. 다음은 엄마에게 보낸 문자 전문이야. 조금의 편집도 없이 그대로 보낸 문자야. 엄마에게 확인해 보면 알아.

 

* 이사 갔더군. 좋은 일로 이사 갔기를 바라네. 그럼, 정말 다행이고. 혜진의 휴학이나 전화 불통, 이사 등 갖가지를 보면서 뭔가 안 풀리나 싶어 걱정도 되고 맘도 불편하고 미안한 맘도 들지만, 난 혜진 엄마나 혜진이가 잘 풀리고, 나와 있을 때 보다 더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네. 혹시 힘들다면 모든 건 지나가게 마련이네.

* 혜진 엄마도 내자동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고, 혜진 엄마의 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교무금에 관한 건 혜진 엄마의 의사를 존중하겠네. 어디로 이사를 간지 알 수 없지만, 혜진 엄마의 특별한 언급이 없으면, 교무금에 관한 건 내가 잊고 있을 테니, 내 얼굴 생각해서라도 실수가 없었으면 하네. 교무금 낼 형편이 안 되면 솔직히 얘기를 하게. 나도 빠듯하지만 내가 처리할 테니. 돈도 돈이지만 새삼스럽게 내가 처리하려니 좀 뭣하긴 하네. 충분히 생각해서 누구를 통해서든 꼭 연락을 주게. 신부님이나 사무실 직원들, 사목위원들 모두 나를 잘 아는데, 내 체면 구기지 않도록 확실히 선을 그어 주게.

* , 혜진 엄마에게 섭섭한 거 없네. ,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애들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해주게. 애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이해시켜 주면 그렇지 않은 혜진 엄마보다는 더 멋지지 않을까. 애들과의 관계가 진전이 없어도 애들이나 나나 양쪽 모두 충분히 잘 살 수 있네. 그러나 회복된다면 그렇지 않은 것보단 더 낫지 않을까. 이 숙제를 풀어 준다면 당신은 내게 좋은 혜진 엄마의 모습으로 남을 수 있네.

 

 

혜진이가 기억할지 모르지만 이혼한 후, 난 엄마를 상당히 정중히 대했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이혼하면서 가족들에게 공동으로 보낸 문자가 기억날 거야. 아빠는 누군가와 헤어질 땐, 그 전이야 어떻든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은 게, 신조야. 엄마에게 정중하게 문자를 보냈지 감정적인 문자를 먼저 보낸 적이 없어. 그런데 아빠의 상기 장문의 문자를 받고 하루가 지나서 상당히 감정적으로 답신이 왔어. 앞으로 문자하지 마라. 궁금한 거는 성당에 가서 직접 확인해라. 교무금은 직접 내라. 이런 내용인데 표현이 상당히 거칠고 감정적으로 다가왔어. 엄마의 언어 습관이나 문장 솜씨 때문인지 모르지만, 상당히 불쾌하고 위기감 있게 다가왔어. 엄마 믿고 있다간 혜진이와 오빠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겠구나, 하고 말이야. 혜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야, 그러니 혜진이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나를 박대하는구나, 생각했어.(물론 이런 오해는 혜진이의 메일로 풀렸고, 엄마가 그렇게 반응을 보일 수뿐이 없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했지만)

 

오빠가 군에 갔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면회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봐야 반겨 줄 거 같지도 않고, 상처만 받고 돌아올 거 같아 면회 갈 엄두도 못 냈지만 ), 오빠를 한 번쯤 만나야 했어, 오빠를 만나면 뭔가 혜진이 소식을 들을 거 같아서. 부랴부랴 오빠가 근무하던 소방서와 병무청과 공군부대 등을 거쳐서 오빠의 군 복무지를 찾았어. 수원 비행단에 복무하고 있었어. 확인했더니 평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면회 가능하다고 했어. 엄마 문자에 대해 답신했어. 혜진아, 미안해. 이 부분에서. 혜진이의 상처가 또 드러나면 어쩌나 해서. 엄마에게 화를 냈어. 문자로. 혜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더 험한 표현을 했어. 혜진이가 잘못됐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순간, 아빠의 감정이 급상승했었어. 엄마가 겁을 먹었는지 혜진이가 캐나다에 있다고 답신이 왔더라. 잠시 안도했지만 오빠를 만나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어서. 어제 4, 광화문에서 출발하여 수원 비행장에 6시에 도착하여 면회 신청을 했어.

 

5. 오빠가 약간은, 퉁명스럽게라도 대해줄 줄 알았어. 첨에 순간 당황했어. 오빠는 안 나오고 전화가 왔더라. 나올 수 없다고. 일이 있어서. 부대까지 왔는데 아들은 못 만나고 전화만 붙들고 있는 아빠가 좀 처량하게 느껴졌어. 면회 담당하는 군인들 보기도 부끄러웠어. 이건 그렇고. 오빠와 장황하게 전화 통화를 20-30분 한 거같아. 대부분 내용이 혜진이가 메일에 썼던 그런 내용이야. 지금은 아빠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야 한다, 연락할 때까지 찾아오지 마라. 아빠가 뭐, 할 말이 있겠냐.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 눈물만 흐르더라. 존재감도 없고, 자식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참, 못난 아빠구나. 군대 면회 와서 보고 싶은 아들도 못 보고 아들에게 뼈아픈 소리만 듣고 돌아서려니 처량하더라. 기쁘고 감사했던 건, 결혼하면 꼭 아빠를 찾겠다. 핏줄을 부인할 순 없다고. 더 기다려달라고, 찾겠다고. 갑자기 찾아온 아빠가 황당했나 봐.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꼬치꼬치 묻더라. 얘기했지. 오빠가 혜진이 얘기를 많이 했어. 혜진이는 잘 됐다고, 우리 집에서 젤 잘 될 거라고. 혜진이는 잘 되어가니 걱정마시라고. 오빠는 아빠 걱정을 많이 했어. 아빠가 하는 일에 관심도 갖고. 오빠를 못 만났지만, 전화 통화로라도 충분한 얘기를 했어. 혜진이에 대해서 완전히 안심했고.

 

돌아오는 데 오빠에게서 전화 왔어. 엄마에게 전화했나 봐. 왜 갑자기 아빠가 나타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었겠지. 엄마가 오빠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게 매우 화를 내더라. 첨엔 내 말은 듣지 않고 거의 일방적으로 엄마에게 어떻게 했는지 말하라고 몰아붙이더라. 내가 차근차근 얘기해도 듣질 않는 거야. , 이제 나는 완전 외톨이구나, 내 편은 없구나, 하는 생각에 좀, 외로워지고 눈물 나고, 대화가 안 될 거 같아, 포기하고 전화를 끊었어. 조금 후에 다시 전화가 왔어. 미안하다고, 아빠 얘기를 들어 보자고. 아빠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어. 오빠가 얘기했어. 엄마 얘길 듣고, 아빠 얘길 들으면 다 다른데, 아빠가 좀 이해를 하라고. 오빠나 혜진이는 엄마와 함께 사니 엄마한테 쏠린다고. 엄마가 중요하지만, 오빠와 혜진에겐 아빠도 아빠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선 확실하게 엄마에게 얘길 하겠다고. 같이 살기 때문에, 엄마에게 더 쏠리는 상황을 고려하겠다고. 아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노력은 하겠다고 얘길 했어.

 

6. 혜진아, 오빠를 만나보고, 혜진이 메일을 받아보고 충격도 크고, 심란하기도 하고, 생각할 것도, 반성할 것도 많지만, 혜진이나 오빠가 어린아이가 아니란 걸, 정도에서 벗어나 있질 않고 중심을 잡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해.

 

7. 아빠도 인간이기에 혜진에게 섭섭한 게 없을 수 없지만, 혜진이의 적나라한 속맘을 읽고서, 아빠의 섭섭한 맘들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자취를 감추었어. 혜진이의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에 비한다면 아빠의 섭섭함은 사치에 불과한 거 같아. 아빠의 섭섭함은 혜진이의 메일을 가끔 읽으면서 하나씩 지워나가기로 할게. 그동안 혜진이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 아빠가 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혜진이의 메일을 계속 읽는 것으로 대체할게. 메일을 읽을 때마다 눈물 흘리고 우울해도 그것이 혜진이가 당한 고통에 답하는 길이라면, 시간이 흘러 혜진이가 아빠의 공포와 불안에서 해방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아빠가 혜진이에 대한 사랑을 쌓아가는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보고 싶어도 연락하지 않는 거, 만나고 싶어도 기다리는 것뿐이 달리 방법이 없는 거 같은데. 읽고 또 읽고, 눈물 흘리고 또 흘려서 눈물이 마를 날이 오면 그때가 혜진이를 만날 날이라고 생각할게. 혜진이나 오빠의 생각이 바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희망하면서.

 

8. 오늘 참, 많이 우는구나. 많이 울어. 자판 한 자, 한 자 두들길 때마다 눈물이 나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어. 불효한 것이 사무쳐서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많이 울었는데. 살아 계셨을 땐 몰랐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그 자리가 커서 그 공허함이 한참을 갔는데. 할아버지가 나이가 들어 아빠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존재였지만, 할아버지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빠에겐 큰 위안이 됐던 거 같아. 그것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알게 됐단다. 모든 게 그렇듯 당시엔 몰랐는데, 뭔가 깨우쳤을 땐 이미 늦었더라. 지금도 할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어. 아빠가 혼자 외롭게 버려졌구나, 생각이 들 땐 할아버지가 더 그립고 보고 싶어. 생각해 보면, 아빠도 할아버지에게 많이 맞으면서 자랐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이도 싸우셨고. 아빠는 그게 싫었어. 아빠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시골을 벗어나는 거였어. 할아버지 품을 벗어나면 잘 살겠지, 했기 때문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를 떠나게 되었고, 직장 생활을 1년하고, 재수해서 대학을 들어갔지. 대학에 들어간 이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경제적 도움을 많이 받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갖은 고생해서 아빠를 대학까지 보냈지만, 아빠는 보답하지 못했어. 성인이 되고, 결혼했지만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할아버지에게 손 벌리는 일도 가끔 있었어. 엄마와의 결혼은 가정 형편상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도움은 받질 않고, 작고 조촐하게 내자동 공원 앞 월세방 한 칸에서 시작했어. 그때 갓난아기였던 혜진이가 뜨거운 물을 쏟아 화상을 심각하게 입었고, 아빠가 화상에 좋은 약을 사러, 서울 전역을 뒤지고 다닌 날들도 있었다. 그 모습들이 눈에 선하구나. 그때 그 화상으로 혜진이의 볼과 손등에 화상 자국이 깊게 있었는데, , 참 그 자국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다.

 

9. 돌이켜 보면 아빠가 할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이, 아빠를 통해 혜진이나 오빠에게 대물림된 것은 아닌지, 회한이 든다. 혜진이는 아니겠지만 오빠가 결혼하고, 오빠가 오빠의 자식들에게 폭력을 하고, 오빠도 오빠의 자식들에게 외면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아빤 그런 오빠를 상상하면 아빠가 혜진이나 오빠에게 외면당하는 지금의 외로움보단 오빠가 자식들에게 외면당하는, 혹시 올지 모를 미래의 그런 오빠를 상상하는 게 더 괴롭다.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이해할 수가 없단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란 말이 있어.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지만, 자식들은 그것을 헤아릴 수가 없단다. 부모에게 자식은 짝사랑의 대상이야. 혼자 사랑하다 혼자 상처받고, 혼자 외로워하고, 버림받는 거, 이게 부모의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다. 혜진이도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봐야 알 거야. 지금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갈 거야. 혜진이가 이걸 알 나이까지 아빠가 살아 있다면 그때 혜진이와 아빠는 상당히 동병상련일 거야.

 

아빠는 혜진이나 오빠를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지만 -한 인간의 존재가 우주의 관점에선 하나의 점에 불과하듯이- 그 사랑이 혜진이나 오빠가 아빠에게 느낀 공포와 불안이라는 거대한 우주 속에서 하나의 점으로만 보이는 거지. 아빠는 그걸 충분히 알기에 대비를 해. 아빠는 주머니에 가족관계 증명서를 가지고 다녀. 거기엔 아직 살아 있는 할머니와 오빠와 혜진이가 기록되어 있어. 아빠에게 변고가 생기면 아빠의 장례라도 치러주면 그것으로 충분해. 아빠가 사는 집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 그 사람에겐 오빠가 소방관이라는 사실을 얘기해 줬어. 오빠는 공직에 있으니 금방 조회가 가능하잖아. 아빠에게 변고가 생기면 오빠에게 연락해 달라고. 그렇다고 아빠가 당장 어떻게 되고 그런 건 아니고, 아빠는 건강하게 살아 있어. 너무 잘 살아 탈이지. 아빠는 혼자이구나, 하는 것을 항상 명심하고 있을 뿐이지.

 

10. 캐나다엔 언제 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생활은 어떻게 하는지, 향후 계획 등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참 신기해. 캐나다에서 자리 잡고 행복하게 산다는 게 참 신기해. 어떻게 캐나다까지 가게 됐는지 참, 신기해. 사람 인생은 모를 일이야. 오빠에게 혜진 얘기를 듣고, 하느님이 나를 버리진 않았구나, 혜진이나 오빠가 잘되도록 하느님이 도우셨구나, 생각했어. 주위에 성당 일을 열심히 한 교우들의 아들, 딸들을 보면 대개 잘 돼는 경향이 있어. 어른들끼리는 덕담을 주고받아. 봐라, 네가 성당 일을 열심히 하니 자식이 잘되는 거다, 하고 말이야. 아빠는 생각했어. 그럼 우리 자식들은? 오빠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았어. 고생은 되지만 보람 있고, 월급도 괜찮고, 신분도 보장되니. 우리 혜진이는 어떨까, 아직은 불확실한데, 하고 생각해왔는데,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도 하네. 혜진이 말대로 지금이 행복하다면, 됐어. 고맙고, 신기해, 참 신기해. 혜진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 연락 줘서 고마워. 혜진, 이름 두 자만 보고나 들어도 아빠는 기쁘고 반갑고 눈물 나고 가슴이 뛰어. 전화로 목소리를 듣거나 만나면 그 기분이 어떻겠니? 상상이 가니? 그러나 이 모든 거, 다 미루어 놓겠다. 아빠 걱정하지 말고. 한동안은 혜진 메일 읽고 울고, 우울한 날들이 반복되겠지만 금방 털고 일어날게. 혜진아 고맙다. 혜진이가 행복해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