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자서전

캐나다에서 온 두 번째 편지 - 딸에게서 멀어져 가려는 아버지

악나라 수호자 2023. 10. 30. 11:32

혜진에게 !!

 

혜진의 두 번째 메일을 받으니, 전체적으로 정리가 되네. 아빠는 혜진이가 잘 있고, 행복해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해. 자식이 태어나서 시간이 흐르고 자식이 성장해 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점점, 부모에게서 멀어져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어. 자식이 성장해 갈수록 부모는 자식이 몸에서 뚝, 뚝 떨어져 나가는 이별 연습을 매 순간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자식이 태어나서 3-4년 동안 부모에게 집중적으로 준 기쁨은, 그 이후 부모가 평생에 걸쳐 자식에게서 받을 수 있는 섭섭함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을 해. 혜진이가 그동안 아빠에게 준 기쁨만으로도 고마워. 지금 혜진이가 인생 최고의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기쁨과 고마움이 공존한다.

 

혜진이가 하는 일을 알고, 안심했고, 하느님께 감사했어. 하느님이 개입하면 불가능해 보일 거 같은 일이 기막힌 우연으로 생길 수 있는데, 혜진이의 캐나다 거주도 이와 같은 범주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신기해. 혜진아, 이럴 때일수록 아빠에 대한 미움을 조금씩 버리고, 하느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좋은 일이다. 캐나다 생활이 여러 각도에서 혜진이 인생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거다. 다양한 선택지가 생긴 거지. 어학을 습득하는 기회이고, 캐나다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도 있고, 한국에 들어온다 해도 캐나다에서 학부모들과 쌓은 인연이 혜진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소지도 있고. 초중고시절 선생님들이 혜진이를 좋은 아이로 보았듯이, 캐나다에서도 혜진이의 성품이 인정받을 거야.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혜진이가 불필요하게 심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도록 아빠의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도록 노력할게. 언젠가 혜진의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가 걷힐 날을 기대하면서. 아빠의 보고 싶은 맘보단 혜진의 심적 안정이 중요해. 아빠로 인해 며칠간 메일을 주고받느라 혜진이의 안정된 생활이 혼란스러우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도 생기네. 아빠의 이름만 봐도 공포와 불안의 이미지가 생긴다 해서, 이 메일도 써야 할지 고민했지만, 혜진이가 한 번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혜진이가 진솔하고 정확하게 맘을 보여 준 거, 혜진이의 상처가 부화하지 않기 위해서 혜진이가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을 인식하고 있는 거, 아빠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해. 핵심적인 내용이 다 들어간 요약이 잘 된 메일이었어. 고등학교 때인가, 대학 다닐 때인가 혜진이 리포트를 아빠에게 보여줬어. 혜진의 문장력을 보고 깜짝 놀랐었어. 혜진이가 이렇게 글을 잘 쓰나, 했는데 역시 혜진이의 문장력도 대단하다. 오빠는 아빠를 정확히 보고 있었어. 이성적인 거 같다가도, 한순간 미친 듯이 감정이 파열해 버리는 이중적인 면을 아빠에게서 느낀데. 아빠를 접하는 교우들도 그렇게 말하고, 아빠 스스로 이점을 잘 알고 있어. 조절하려는 데 잘 안 돼. 엄마에게 화를 냈지만, 메일 주소를 주면 혜진이가 연락하겠다는, 문자를 엄마에게서 받고, 정식으로 사과했어. 이젠 엄마와 문자를 주고받을 일도 없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오빠를 통해서 연락할거야. 나도 그것을 원하고, 오빠도 그렇게 하라고 했어. 글쎄, 난 이혼하면서 모든 것들을 다 털어버렸고, 엄마에 대한 연민도 생기고, 혜진 엄마로서 존경하고, 정중하게 대하고 싶었는데, 엄마와는 뭔가가 잘 안 맞아. 바라보는 방법과 종착지가 많이 다른 거 같아서 직접적인 대화를 피하고 싶어. 모든 게 말끔하게 정리가 됐으니 대면할 일이 없겠지. 혜진과 오빠 결혼식 때나 만날까!

 

이혼 관련, 아빠에게 여러 차례 폐부를 급습했던 음습한 고독의 순간들이 있었단다. 가장 크고 깊은 고독은 맨 처음으로 왔었는데 그것은, 아빠가 이혼해도 괜찮겠어, 하고 혜진에게 물었을 때 혜진이 주저 없이 응, 하고 답했을 때. 두 번째는 이삿짐을 싸서 남 눈에 보이지 않게 밤에 이삿짐을 옮기는데 오빠가 빤히 쳐다보면서 손끝 하나 거들어 주지 않을 때. 세 번째는 이사한 후 밖에 나갔다 들어오며 불 꺼진 거실을 여는 순간.(이후 아빠는 밖에 나갈 때 항상 거실 불을 켜 놓고 나간다.) 네 번째는 혜진이가 반복해서 아빠의 전화를 받지 않을 때. 다섯 번째는 아빠 혼자의 이름으로 발급된 지역 의료보험 카드를 우편으로 받았을 때, 여섯 번째는 내자동 집엘 갔는데 집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일곱 번째는 성당 사무실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 교적에 아빠 홀로 남아 있음을 발견한 최근.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서 이혼은 완성됐다. 혜진과 오빠의 상처가 치유되고 재회가 이루어진다면 아빠의 삶은 완성되는 거다.

 

언젠가 혜진의 맘이 열리고, 친구처럼 이러 저러한 얘기들을 조곤조곤하게 할 날을 기대할게. 혜진의 두 번의 메일을 통해서 아빤, 혜진이와 오빠에 대해 심층적으로 많이 알게 된 거, 아빠에게 받은 상처가 깊어 아빠를 멀리할 수 뿐이 없는 혜진과 오빠지만, 근본에서는 중심을 잡고 있음을 알게 되어 천만다행으로 생각해. 아빠 생활을 다 얘기할 순 없지만, 혜진과 만났을 땐 아마, 아빤 변해 있을 거다. 시급히 뭔가 할 일이 생긴 것도 같고. 언젠가는 아빠의 진심이 전달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고맙다, 혜진아. 행복해 주어 고맙고, 소식 주어 고마워.